2008 [flcker:사이] 개인전
[모호한 실재들에의 경의]
이 재 준 (미학)
켜켜이 쌓인 시간의 기억들은 모든 것이 그리 투명하지 않다는 걸 자인케 한다. 과연 잔인한 토로다.
누구나 그럴 게다. 이 기억들을 가방 안에 가지런히 담고 싶은 거 말이다. 하지만 그 가방을 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가방 안 모든 것은 뒤죽박죽 섞인다. 이름 모를 길 모퉁이에 주저 앉아 점점 무거워진 가방 무게를 좀 줄여볼 요량으로 뚜껑을 활짝 열어보면, 정말 가관이다.
점증하는 가방의 무게를 나이 들면서 쇠잔해진 두뇌능력 탓으로 돌린다면, 그건 단순한 착각이다. 예컨대 피부의 감각을 생각해보자. 양수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의 온 몸을 수축시키는 쌩한 공기, 차가운 의료도구, 의사와 간호사와 엄마와 아빠의 손, 그리고 지금 내가 두드리고 있는 자판의 플라스틱 표면. 이 모든 것이 가방의 무게에 더해졌고 또 더해지고 있다. 대체 얼마나 큰 크기의 가방이 필요한 것일까? 가방에 구멍이라도 숭숭 뚫려 거리마다 그 내용물을 줄줄 흘리고 다니지 않는다면, 거대한 컨테이너 트럭이라도 사야 할는지 모른다. 너나 없이 그걸 사기엔 값이 너무 비싸다.
돌이켜 보면, 피부 경험의 연속된 시간 스펙트럼은 쭈욱 이어지지만, 사실상 깜냥에 맞는 가방 무게를 위해 망각이라는 경제성 원리가 작동한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기억과 망각의 이 어쩔 수 없는 길항 운동은 ‘나의 이름표’를 단 유일한 가방을 만든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권리는 오직 그 가방 주인에게만 허락된다.
하나
무언가를 ‘안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 이런 비유를 썼다. “날은 어둠을 벗어나 아침을 지나야 정오에 이른다 Ex nocta per auroram meridies.” 그는 ‘인식’이 모호함 속에서 명료함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었겠지만, 우습게도 밤은 항상 또 다시 찾아온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결국 끝없이 거듭해서 밤과 낮을 오가는 노고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어느 순간에 어떤 가방의 소유자는 어둡다고 말할지 모르며, 다른 가방의 소유자는 밝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여기에 하나만 더 덧붙이자. 우리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 하는 일이란 어디부터가 밤이고 어디부터가 낮인지를 구별할 수 있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구별에서 시작하라!” 꽤나 거창한 말이다. 그러나 무엇을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을는지. 밤을 기준 삼아 구별할까? 낮을 기준 삼아 구별할까? 아니면 나를 기준 삼아 구별할까? 가장 쉽게, 아니 가장 타당하게, 나를 기준 삼아 구별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밤과 낮을 구별하는 나와, 그 나를 구별하는 나, 즉 나를 향한 또 다른 구별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구별은 다시 거듭되고 거듭될 것이다. 말하자면 구별은 구별을 낳고 다시 구별은 구별을 낳는다. 결국 구별의 구별은 계속 진행돼서 구별 자체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차이를 만드는 이 순환 고리 속에 ‘닫힌 존재’가 다르게 또 다르게 있다.
어둠과 빛 사이를 모호하게 흐르는 경계선 위로 낯선 무언가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언젠가 어느 길 모퉁이에서 가방에 걸터앉아 넋 놓고 저 멀리 바라보던 그였다(<Flows>, 2008). 그는 자신의 가방 안을 뒤적이면서 사진 몇 장을 꺼내 바라본다. 물론 자신의 것이되 낯설다. 그리고 이내 이것이 지금 그의 현실임을 직감한다.
한때 사진의 역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인물들처럼, 카메라를 손에 든 또 다른 이들도 그 어떤 감정의 이입도, 언어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진을 찍겠다는 리얼리즘적 기대를 피력했다. 초현실주의자들 또한 사진이 주는 이런 기대에 부풀었다. 그들은 우리 눈의 경험이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거기 있다고 간주된 새로운 현실에 열광했다. 그들은 그 현실이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우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정작 그것은 우리 의식의 논리에 억눌린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일 뿐이었다. 결국 그것은 헛수고였다.
오히려 이런 기대는 카메라가 빛으로 그린 그 세계를 전유하겠다는 바람일 뿐이다. 따라서 사진을 찍는 이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느낌과 함께 자신의 의미를 계속 생산하고, 의미의 의미를 생산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사진은 카메라가 지닌 고유한 보기 방식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것이 카메라가 지금까지 우리 시대에 새겼던 분명한 흔적이다.
사진은 정작 망각과 기억 사이를 오가는 힘겨운 줄다리기에서, 즉 사라져가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이들의 욕망에서 탄생한다. 침묵하는 과거와 이것을 지금 내 손으로 다시 꺼내 제목소리를 내게 만들려는 힘겨운 욕구가 거기에 비집고 들어서있다. 김지현의 작업이 출발한 곳은 바로 거기다.
김지현은 자신이 찍었던 사진들을 가방 안에서 꺼내 바라보며 잃어버린 ‘나의 현실들’을 되찾아 이 현실과 저 현실을 이어본다. 이제는 낯선 것이 될 만큼 시간을 잃은 순간, 현실이 망막 위의 먼지처럼 부유한다. 초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차가운 순간, 누군지도 분간할 수 없는 의미가 불쑥 얼굴을 내민다. 당황할 수밖에 없는 시선을 준다(<or not>, 2008).
둘
만일 우리가 밖을 향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만일 우리가 원래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라면, 만일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닫힌 존재’라면, 무척 외롭고 힘들겠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무서운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 번쯤 용기를 내어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것저것을 해보고, 누군가를 만나며 누군가와 헤어지며, 무언가를 만지고, 듣고, 또 느낄 것이다.
‘살아있는’ 닫힌 존재에게는 그만의 현실이 있다. 또 다른 존재에게도 그만의 현실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존재에게도…이렇게 해서 서로 다른 수많은 살아있는 존재들에게는 수많은 현실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르고 다른 존재들에게 필연적으로 우연적인 만남이 있다. 만남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고 현실들은 또 다른 현실들과 공명한다.
그렇지만 어떤 존재의 현실은 다른 존재들에게는 다른 현실이며, 그 현실은 앞의 어떤 존재에게는 또 다른 현실이 된다. 이렇게 해서 현실들은 다른 현실들로 무한히 생성된다. 그래서 만일 저 머리 위에서 제3의 눈이 있어 이 현실들을 관찰한다면, 서로에게 낯선 그것들은 지극히 모호한 모습을 한, 아니 영원히 흐르고 있는 현실이 될 것이다.
어느 날 저녁, 함께 모인 친구들. 그런데 이 흥겨운 자리에서 다정하게 장난 치는 그들의 모습은 일순간 다른 현실로 나에게 나타난다. 불 타오르는 불안정한 공간에서의 다급한 몸싸움처럼(<토요일 밤>, 2008). 또 누군가에게 행복한 현실은 불행한 것일 수 있으며(<in a flash>, 2007), 잘 아는 이들의 조용한 대화는 열띤 토론처럼, 어떤 만남은 환한 웃음과 외면이 공존하는 것처럼, 나의 경험을 구성한다(<Between>, 2008). 규정을 멈춰 끊임없이 진행하는 이 형태와 색들은 닫힌 존재들의 현실을 관찰한 김지현의 객관적인 기록이다.
셋
그녀의 이 작업들은 고독한 존재들의 현실이 서로 만나고 있는 지점에서 흔들리는 관계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사실 이 유동하는 듯한 관계들은 교란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말하자면 서로 소통하는 형식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지현은 내게 보낸 편지에서 함민복 시인 시 한편을 인용하고 있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뻘>, 2005)
나와 흙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다. 나는 나대로 흙은 흙대로. 그러나 이 흙은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말랑말랑하게 잡아주며, 또 걸어 가는 길이 어딘지 말랑말랑하게 안내해준다. 그리고 나는 그 흙에게 나의 발자국을 꾹꾹 남겨준다. 거기에 바닷물이 스며들어 작은 웅덩이를 만들면 또 다른 존재들이 기거할 것이다. 내 발을 잡아준 뻘과, 내 발과, 내 발에 밀린 뻘과, 스며든 물과 우연히 거기 안착해 고요히 낮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와(<Flows_고양이>, 2007>).
닫힌 존재들이 공명하면서 서로 흔들리고 있는 과정을 기록하려 한다면, 고속셔터와 고감도 필름이 아니라 일상의 저급한 수동 카메라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의 진상은 의식의 부재 속에서 우연히 불러내져야 살아날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일는지 모른다.
, 그리고
한편 김지현은 은밀하고 사적이며 가물가물한 형상들에서 벗어나, 타란튤라tarantula 독거미의 재구성을 통해 ‘닫힌 존재들의 관계와 공명의 거대한 결’을 다시 한 번 문제 삼는다(<Nontitle>, 2007-2008) . 작아보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맹독과 위협적인 검은 피부, 그리고 빳빳하게 세워진 털들의 결을 지닌 존재가 바로 그놈이다.
각각의 닫힌 존재들에게 사회는 거대한 권력으로 등장한다. 그것의 크기가 점점 불어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형상은 결코 손에 잡히지 않을 것처럼 모호하다. 그러나 권력이 행사하는 압력의 세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개별 존재들에게 그 형상은 더욱 더 구체적이며 직접적이다. 또한 더 끔찍한 것은 그 권력을 구성하는 몸통과 마디와 독과 털의 결들이 다름 아니라 닫힌 존재들 모두로부터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김지현은 이 모든 것을 해체하려 한다. 그놈의 몸통과 마디를 잘라 이리저리 재조합하고, 다른 형상으로 변형시키고, 빳빳한 털의 결을 비비 꼬아 위협을 냉소적으로 희화한다. 그리고 이 작업을 계속 진행시킨다.
한 동안의 침묵을 거친 후, 삶의 가방에서 꺼내든 사진들에서 닫힌 존재들과 그들의 관계를 관찰하고 있는 김지현의 작업들은 나름대로의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추구하는 이 언어가 더 보편적인 형식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Dis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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