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작가노트
나는 인물이나 주변 풍경을 흐릿하게 그려서 인간의 중층적인 감성을 표현하려고 한다. 누구든 해보았을 상반된 감정이 뒤엉키는 경험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실험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시적 언어처럼 선명하고 직설적인 이미지는 형언하기 어려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오히려 단순화 시킨다고 생각한다. 뚜렷하고 확실한 주제보다 주변적인 것, 사소한 사건에 더 관심을 갖는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큰 특징이 없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도로변 풍경 또는 일상적인 공간을 속도감 있는 붓질, 흘러내리는 질감으로 그린다. 그림마다 붓질의 방식, 물감을 쓰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작품에서 펼쳐지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나만의 표현법이기도 하다. 그림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하더라도 대부분 나는 명확하지 않은 선과 색으로 묘사하며, 감정적인 붓질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런 중첩된 색, 감정적 붓질, 물감의 질감 등을 관람자로 하여금 관찰하고, 추론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관람객이 그림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그림 속 사소한 풍경과 일상이 관찰자만의 유의미한 경험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아무리 흔하고 지루한 일상이라도 결코 사소한 삶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동수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 세상을 떠도는 부랑자가 된 듯 세상과 나 자신을 관조하게 된다. 흔들리는 풍경, 멀리 보이는 지평선, 사람들의 사소한 흔적들 그리고 그 삶의 터전을 잠시 빌어 지나가는 내가 보인다.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찰나는 기억하기에 너무 짧고, 강렬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시공간은 내 기억 어딘가에 파편처럼 박혀 영향을 미친다. 굳이 그 순간들을 정지된 화면에 오래 남겨 두고자 함은 뚜렷하지 않은 공간과 영원하지 않을 시간의 한 편린에서 받았던 편안한 감정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