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something over the something>
김지현 최지연 2인전
2014. 03. 19 - 04. 20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은 똑같을 수가 없다. 그것은 두 사람의 가치관과 살아온 환경 등 그들의 스키마에 의해 해석된다. 게다가 시각 예술이다.
관객들의 시선에 앞서, 작가의 시각으로 대상을 자르고 구성한 작품들은 그 제시하는 이미지가 아무리 설명적이고 선명하다 할지라도 결국 또 하나의 주관일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할수록 더 미궁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한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생각의 교집합들을 모아볼까? 혹은 깨진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연못 속에 독을 던져 넣었듯이 당연하다 여겨온 그 방법을 버리면 가능할까?
최지연 작가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 작용하는 객관적 분석과 직관에 의문을 갖는다. 그 의식의 회로는 과연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나 하는 것일까? 우리가 바라보는 한 대상에 대한 분석이 이토록 상이한데, 과연 우리는 ‘객관’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떨까?
일차적으로 생각해보면 여타 매체와 구별되는 사진만의 기술적 특징은 직관적 기능에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사진기술의 특징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처럼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여긴다.
작가가 선명하고 설명적이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뿌옇고 흐리게 만든 일련의 작품들은 마치 ‘누드’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명적 디테일이 제거된 작품의 흐린 이미지를 한참이고 들여다보고 있자면 명확함이라는 옷을 벗은 자유로운 사물 그 자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김지현 작가는 어떤 기억이나 사건에서 출발하여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흐릿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회화적 표현에서는 종종 문자의 제한된 속성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슬픔’이라는 감정은 전후좌우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슬픔’이라는 문자만으로 한정짓기 어려워지고 만다. 직관적인 문자처럼 선명한 이미지는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나 감정 등을 단순화시키면서 그 본질을 알 수 없게 만든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의 조명에 주목하다가도, 그 곳에 가득찬 공기의 냄새, 만나는 사람 사이에서 읽혀지는 미묘한 관계 등도 보게 된다.
아주 사소하고 순간적인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반추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던 사건은 특별한 경험으로 바뀌어간다. 어쩌면 작가는 아무것도 아닐 사건일지라도, 그 너머에는 사소한 삶 따윈 없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