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당신의 기억에 닿다

당신의 기억에 닿다

글. 박주영

 

김지현 작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잇_이어진 이야기」라고 정했다. 동사 ‘잇다’의 어간 ‘잇’을 가져온 이유는 전시장에 놓여 있는 작가 자신의 텍스트를 통하여 충분히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전시된 작품들의 의미에 대한 정의를 다소 선언하듯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요소였다고 느껴진다.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가 자신의 화론을 이야기할 때 언급한 ‘모든 이미지는 그것을 보호할 텍스트를 필요로 한다.’ 는 말처럼, 작가의 다소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그림들의 맥락을 더듬어 나가는 데 있어서 그 글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제가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을수록 더욱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작가의 방식 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나는 ‘여기에 어떤 오래된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에 이어져 있다’ 라는 주어진 단서를 내 감상의 출발점으로 잡았다.


화가는 그저 보이는 것을 그려내는 사람이 아니다. 경험을 시각화하는 일에는 훈련된 기술 말고도 복잡하고 미묘한 사고의 단계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것은 타인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매우 관념적이고 내밀한 영역인 것이다. 작가가 본 것, 안 본 것,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어떤 것,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인지한 것들 모두가 여기 화폭 위에서 새로운 형태로 구현된다. 김지현 작가가 김복동 할머니의 그림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하는 것은 설명적 언어로 아무리 들어본 들 자세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가 그 경험을 통해 좀 더 내밀하고 독특한 공감의 형태를 구축했고, 타인의 고통을 기꺼이 내면화 했으며,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 결국에는 이렇듯 다양한 기법으로 새로운 이야기들을 구현해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우연히 타인의 그림을 보고난 뒤 자신의 내면 어딘가가 그 형태를 바꾸는 일.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 일까? 그것에 대한 평가는 관람객 각자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예술은 역사 이래 늘 그런 종류의 기적을 만들어 왔으니.


김지현 작가가 작가노트를 갈음한 시 「잇」에서 나오는 ‘밤의 연못’에서의 ‘연’은 ‘연꽃 연蓮’이 아니라 초두 머리를 버린 ‘잇닿을 연連’이라고 나는 멋대로 상상해본다. 그가 글과 그림을 통해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연대감과 공감은 어딘지 처연하고 생생하며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두렵고 낯설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나는 애써 덤덤한 마음으로 구석구석 그림을 살피고 그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그렇게 조용하게 작가가 만들어 낸 파동에 나의 파동이 얽힌다. 전시장 안의 작은 공간에 걸려 있는 수마트라의 어두운 숲 풍경 을 보면서 나는 곧장 윤동주의 「편지」를 떠올렸다.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옇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1936년 12월 作)


1930년대 초반부터 ‘위안부’라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인원이 차출되어 끌려갔다고 하니 윤동주가 이 시를 쓴 1936년 말 경에는 참으로 시절이 흉흉했으리라. 이 시의 ‘누나 가신 나라’, 눈이 오지 않는 그곳이 어디일까. 지옥처럼 뜨거운 남쪽의 ‘수마도라’ 역시 해당이 될 테다. 7남매의 장남인 윤동주에게는 누나가 없었으나, 시적 화자인 소년의 이야기는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에 남았다. 나는 작가의 어두운 숲 그림을 「편지」와 이어주기로 한다.

우리는 종종 절망적인 현실을 움직일 수 있는 픽션의 힘을 필요로 한다. 많은 이야기를 품은 사회적 기억, 다양한 맥락과 그것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가 신중한 예술적 표현으로 다루어지고 결국엔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괜찮은 현실을 만들어 나가기를 소망한다. 픽션은 희망의 한 형태로서도 충분히 강력한 힘을 갖는다. 잘 짜인 이야기에 의해 교정된 현실은 다시 우리의 삶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므로.

김지현 작가의 그림과 시, 조형물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우리들 각자의 다양한 맥락과 한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작가는 앞으로도 꾸준히 자신의 내면을 탐색할 것이고, 두려움 없이 외부의 무언가와 이어질 것이다. 소묘로 어떤 대상을 묘사할 때, 그 대상에게 그림자를 그려주는 것만으로 빛이 드러나고, 바닥이 생기고, 그것이 놓인 공간을 파악할 수 있다. 김지현 작가가 스스로의 발꿈치에 기워 붙인 그림자를 볼 수 있다면 그이를 둘러싼 빛과 어둠, 겹쳐진 공간과 뒤섞인 시간을 가늠해 볼 수 있을까.

Comments


Archive
Search By Tag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