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 안소연 미술비평가
- janisrla
- 7월 2일
- 3분 분량

여름이 왔다
SO.S(SARUBIA Outreach & Support) - A그룹 심층비평
김지현 개인전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2025.4.16-5.16 Project Space SARUBIA
안소연
미술비평가
“Winter will shake, Spring will try, Summer will show if you live or die.”
“겨울은 너를 흔들고, 봄은 너를 시험하며, 여름은 네가 살아남았는지 밝혀줄 것이다.”
실비아 타운센드 워너(Sylvia Townsend Warner, 1893-1978)의 소설 『여름이 오면(Summer will show)』(1936) 첫 페이지에 실린 문장에는, 살아남은 것과 대면하게 될 어느 여름에 대한 기다림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워너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1848년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전개와 패배 속에서 귀족 출신의 여성 소피아 월러비(Sophia Willoughby)가 보헤미안과 혁명의 길거리로 나와 또 다른 삶과 죽음에 마주하게 되는 서사를 보여준다. 개인적 삶의 상실과 위기를 겪어낸 한 여성이 파리의 거리로 나와 혁명가로 살아가는 이 소설의 첫 장에 한 문장으로 함축해 놓은 삶의 단상은, 글자의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수수께끼 같다.
『여름이 오면』에 관해서, 이것이 책이고, 어떤 계절에 대해 말하고, 거리를 걷는 여성이 등장하고, 점진적인 알아차림의 순간들에 마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2025)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연 김지현과 그의 작업 앞에서 내내 그것을 떠올렸다. 그와 주고 받은 대화 속에서, 어쩌면 그가 그림을 그리며 겪어온 시간들과 내가 글을 쓰며 지나온 시간들이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어떤 공감과 연대의 마음이 생겨났다. 그가 한 말, “삶의 부침을 겪으며, 주어진 여건에 맞춰 소소하게 전시를 이어왔다”는 고백은, 40대 후반에 접어든 여성 화가의 부담과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치열하게 살아온 30, 40대의 세월은 경력으로 남길 명분이 없는, 수치화가 불가능한 시간이었다”는 인식 속에 “매일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던, 그가 그림 그려온 시간의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김지현의 전시 제목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는, 몇몇 문학 작품에 인용되면서 셰익스피어가 던졌던 질문이라고 전해지는, 첫번째 발화자와 그 출처가 여전히 모호한, 수수께끼 같은 맥락을 가졌다. 김지현은 그것이 “사라지는 것, 흔적으로 남는 것, (그것을) 기억하고자 스스로에게 던지는 뜻밖의 질문”으로 읽히는 문장이라며, 이번 전시의 제목에 가져왔다. 삶의 부침이 남겨 놓은 시간의 흔적과 그것이 회화적 물질(의 잔해)로 남게 된, 명분 없이 보내온 삶과 창작의 뒤엉킨 시간 속에서 스스로 던지는 수수께끼 같은 물음, 기다림과 기대가 함의된 그 서늘한 문장이 이번 전시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그의 (자신을 향한) 질문에 대한 (쓸데 없는) 답을 자처하며, 워너의 소설 속 문장을 가져다 놓았다. “흰빛”의 존재는 “여름”의 선명함 속에서 제 무게에 맞는 자리를 찾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을 테지. 그가 바라는 세계가 영영 도래하지 않더라도, 삶의 부침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돌보며 그것[흰빛]이 존재할만한 영토를 찾아 길과 광장을 하염없이 걷는 마음으로, 비어 있는 캔버스 앞에서 혁명을 꿈꿀 수 있기를, 그는 바랄 테다.
그렇다면 나는, 그와 연대할 나는, 저 흰빛의 흔적이 역력한 그의 그림 앞에서, 어떤 말들을 내뱉을 수 있을까. 그는 서쪽의 도시 외곽 지대에 거주하며 작업하면서, 명분 없는 풍경 회화의 명분을 좇아, 어떤 경계를 점유하는 회화에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라지는 것, 흔적으로 남는 것, 그것을 기억하려는 회화, 그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있을 법한 시각적 경계를 좇는 회화의 명분 말이다. 그는 그림 그릴 수 없었던 시절, 이를테면 아이를 낳아 돌보고, 누군가는 해야 할 집안 일에 힘과 정성을 다하고,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탄생과 죽음을 겪어내며, 차마 그림 그릴 수 없었던 물리적 시간과 장소의 한계 안에서, 글을 읽었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또 얼마나 권위적인가. 그 한계에 치열하게 맞서, 언어를 넘어선 “글”(의 잔해)에 다가가는 일상을 보내며, 시적 언어의 실체가 회화적 명분이 될 자리를 찾아나갔다.
그는 무엇을 봐야 할 지 모를 땅, 물, 숲, 그리고 밤의 단조로운 풍경과 마주해, 그 안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듯, 붓질의 명분을 찾았다. 물기 없는 붓질의 지난한 반복과 연신 흘러내리는 물감의 얼룩이, 현실의 단조로운 풍경 너머에서 무언가를 보고자 하는, 저 수수께끼 같은 물음만 독백처럼 반복하는, 화가의 급진적인 속내를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그가 읽었던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문턱 너머 저편』 속 한 조각의 문장처럼, “내가 찾으러 왔던 것. / (그것은) 잔해 그 자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시의 구절과 속내를 같이 한다.
모든 잔해마저 선명하게 드러날, 여름이 왔고, 그가 좇던 “흰빛”의 회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선명함 속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잔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잔해 그 자체로서 회화적 명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각적 존재로서 물질과 형상 사이를 (쓸데 없이) 오가며, 본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답이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우리 둘의 대화를 더 이어갈 시간의 명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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