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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보면,> 안소연 미술비평가

  • 2월 25일
  • 5분 분량




한참을 걷다 보면,

김지현 개인전 《돌이 기운다 풀은 듣는다》

2025.12.9-12.14 인천아트플랫폼

 

안소연

미술비평가

 

우리의 문장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글쓰기로서의 그의 회화가 언어의 바깥을 서성이는 나의 글과 이어져 있음을 간혹 상상합니다. 내가 그의 작업에 대하여 글쓰기로서의 회화라고 말하는 까닭은, 글쓰기의 문학적 상상력과 글쓰기의 비평적 사유를 오가며 회화에 대한 감각을 되찾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되찾음, ‘회화란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회상과 마주하며, 그는 길 위에 서서 눈 앞에 펼쳐진 이 세계의 모양을 그립니다. 글쓰기와 그리기의 통로, 그 둘 사이에서 이동과 경로 이탈을 반복해오던 나날들은, 풍경이 계절의 순환을 겪어내는 것처럼, 그의 (풍경) 회화를, 보는 것 혹은 보여지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김지현의 그림은 걷는 행위에서 시작해 쓰기와 관계 맺으며 회화의 가장자리를 맴돌다가 그 셋 사이에 어떤 통로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비로소) 보여집니다. 보여짐. 한 장소 안에서 목적지를 향하지 않는 그의 걷기는, “쓰여진” 것들의 잔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앎의 순간으로 나아가고, 그것은 다시 색채로 물든 회화 속으로 이송됩니다. 그의 그림은 장소가 되고, 걷기와 보기와 쓰기로 옮겨지며 끝없이 탈주를 시도하는, 넓은 가장자리를 가집니다.

   내가 그의 작업실 갔을 때, 허리를 접고 벽과 바닥에 기대어 앉아 있었던 큰 그림, <서로의 무게에 기대어 서서>(2025)는, 네 개의 캔버스를 수직으로 길게 세우리라 마음 먹고, 그가 여름내 그렸던 그림입니다. 그 옆으로 또 다른 세로 그림 두 개가 수직으로 길게 걸려 있었는데, 위에 있던 그림은 <순간 마주치는 감각으로>(2025)였고, 그 아래에는 <눈을 가리면 볼 수 있고>(2025)가 바닥에 한쪽 모서리를 대고 벽에 기댄 채, 위의 그림과 연결되듯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 풍경 그림의 제목도 모르고, 둘이 길게 이어진 모양이 그저, 저 그림으로 향하는 나의 시야를 낯설게 굴절시킨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가 여름내 폭포 그림을 그리고 있을 동안, 나는 지난 여름부터 겨울을 향해 가는 이 글쓰기의 시간을 보내며, 그가 지난 전시에서 독백처럼 되묻곤 했던 물음,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을 뒤쫓다 보니, 어느새 다시 눈 내리는 겨울에 와 있는 나를 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흰빛”의 행방을 좇던 이가, 그해 여름 홍제천 인공폭포 물줄기를 떠받치는 거대한 절벽 앞에 멈춰 선 까닭을 곰곰이 생각하다, 눈 앞에 일으켜 세운 저 그림(들) 앞에서 이제야 나의 시야를 가득 덮고 있는 “저 흰빛”의 파동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흰빛의 결속을 봅니다. 동네를 걷고 또 걸으며, 한참을 걷다 보면, 흰빛의 결속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풍경과 마주합니다. 그의 걷기는 일상적인 시공간의 틀을 벗어난 일종의 탈주입니다. 목적지 없는 이 산책자의 시선은 현실의 북적임을 뒤로 하고 풍경의 가장자리, 자신의 걷기를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결코 닿지 못할) 지평선을 향하는 듯 합니다. 그 황량한 가장자리의 풍경 앞에서, 그는 이제 중천에 떠오른 해가 거친 흙더미 위에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전소시킬 듯 위협하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세차게 쏟아지는 여름비들이 숲의 살아있는 것을 온종일 적시다가 밤이 되기도 전에 이 습기로 모든 형상의 경계를 지워버릴지도 모른다는, 그 공백과의 대면을 생각해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뜻밖의 그림, <서로의 무게에 기대어 서서>는 회화의 가장자리를 향합니다. 흰빛의 행방이 이 폭포였나 싶었던 찰나에, 나는 네 개의 캔버스 모서리가 만나는, 저 큰 그림의 한가운데를 봅니다. 거긴 가장자리입니다. 각각의 지평선을 가진, 불완전한 풍경의 잔해들이, 저마다 가장자리의 틀로 간신히 붙잡아 놓은, 이 네 개의 모서리가 수직적인 큰 그림의 축으로 자리합니다. 이 가장자리의 이동, 그의 걷기는 이런 식으로 탈주합니다. 서로 다른 모서리가 이동하여 큰 풍경을 만들고, 그것의 회화의 공간이 됩니다. 이때 그는 이 그리기의 공간 안에서 쓰기의 감각을 불러 옵니다. 그리고 다시, 걷기-그리기-쓰기의 감각.

   수직으로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의 이미지)는 단지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보여지는 것”에 반응합니다. (보여진) 큰 것에 반응하기 위해 그는 뒷걸음질 칩니다. (보여진) 작은 것에는, 사려 깊으면서도 예민한 시선으로 숨을 참고 그것과 마주했을 겁니다. <서로의 무게에 기대어 서서>는 보여진 것들의 풍경으로, 자신의 붓질을 뒤쫓아 길을 걷는 한 사람의 걸음걸이가 보입니다. 그것은 “쓰여진” 것들에 의한 (불가능한) 글쓰기와도 같습니다.

   그는 아이를 돌보는 일상의 형편 속에서 그리기의 통로를 찾지 못했을 때,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이 세계의 생김새를 그려나갈 가장자리를 살폈습니다. 이때 읽기와 쓰기를 매개한 것이 “쓰여진” 것들입니다. 삶의 수수께끼에 가 닿은 단어들, 문장들, 그것이 그에게는 회화의 가장자리로 들어설 수 있는 또 다른 통로가 되었을 겁니다. 무심코 걸었던 이 길의 끝에서, 그는 회화의 해방을 마주합니다. 회화의 해방이라는 이 말은, 너무 거창해 들릴 지 몰라도, 내가 그의 글쓰기로서의 회화에 부여해주고 싶었던 가치이자 실천입니다.

   이 해방이야말로, 글쓰기가 그에게 회화로 가는 통로를 내어준 방식입니다. <길을 내어준다>(2025)에서 수직과 수평은 둘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나의 화면에서 만납니다. 계절의 변화를 쫓아 하루하루의 시간을 성실하게 소요한, 이 걷는 자의 몸은 가장자리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퇴적층의 절벽을 따라 자라나는 푸른 이끼와 작은 식물들, 그 위로 낙하하는 힘찬 물줄기와 흩어지는 물방울(들),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수평으로 이동하는 바람, 이 풍경에 새겨진 까다로운 형상들은, 지워지고 마모된 고대 언어의 흔적처럼, 한 사람의 눈동자에 천천히 “보여질” 뿐입니다. 그는 이제 이 보여진 풍경, 쓰여진 언어, 그것을 잇는 그려진 회화로 나아갑니다.


   <무엇이 흔들고 무엇이 듣는가>(2025)는 걷는 자의 질문입니다.

   그리는 자가 말합니다. 돌이 기운다, 풀은 듣는다.    


   이번 개인전 제목은 《돌이 기운다 풀은 듣는다》 입니다. 흰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이 그와 나를 연결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알아차리기 위해 흰빛의 행방을 찾는, 목적지가 없이 걷는 자입니다. 몸의 이동, 그것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글쓰기에서 그리기로, 그리기에서 걷기로, 걷기에서 글쓰기로 끊임없이 탈주를 일으킵니다. <무엇이 흔들고 무엇이 듣는가>는, 그리기에 직면한 그의 물음입니다. 그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한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어떤 정황을 봅니다. 실체가 아닌, 정황을 그리겠다고 마음 먹은 한 사람은, 이내 억새의 흔들림이 캔버스 위의 물감으로 그려지는 순간을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전소된 단어들로 시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 없는 정황으로서, 그려진 순간에 다다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화가의 그리기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봅니다. 흰빛. 그것이 만들어낼, 스스로의 정황으로 이 풍경을 뒤바꾸어 놓을 흰빛의 요술을 기다립니다. 하늘과 풀의 경계가 하나의 정황으로 맞닿게 되는, 색채로 물들어 가는 가로의 직사각형 캔버스 앞에서 팔을 뻗습니다.

 

   풀의 입장에 서서 ‘대체 누가 자신을 이토록 흔들리게 하는가 생각해 본다. 해지는 바닷가, 누구와도 대립하지 않고 나란히 서서 오로지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데, 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투명한 간절함으로 만드는 것인가!’라고 생각해 본다.

 

   그의 캔버스는, 책과 같습니다. 언어의 잔해를 운반하는 책. 물질과 형상의 경계 없이, 이 세계의 가장자리로 떠밀려 가는 황량한 풍경을 앞에 두고, 그는 일상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묶어낼 수 없는, 크고 작은 삶과 죽음이 수없이 반복되는 정황을, 홀로 알아차립니다. 그 풍경의 자락을 운반하는 사각형, 책, 그리고 그림.

   <생각보다 길고 낮다>(2025)와 <점점 분주하고 깊어진다>(2025)는 양쪽으로 펼친 책장처럼 서로 마주합니다. 둘은 연속하는 문장들로 이어질 것 같다가도, 둘 사이에는 미지의 어떤 시차가 크게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 사이의 틈, 그가 걷기를 통해 알아차린 정황들은, 대개 이 틈새의 시간을 이동하며 제 형상으로부터 탈주하는 풍경 속에서 일어납니다. 눈이 녹고, 땅은 물이 됩니다. 모든 것은, 매순간 사라지고, 또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는 익숙한 것을 걷어내는 방식에 의해 끝까지 살아남은 붓질로, 실체 없는 정황으로서의 풍경, 글쓰기로서의 회화에 다가갑니다.

   눈 덮인 땅과 그것이 녹아서 움푹 파인 땅에 웅덩이를 이룬 봄못은, 일종의 연금술 입니다. 흰눈은 녹아서 단지 물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정황을 만듭니다. 터전이지요. 봄에 땅 밑으로부터 다시 되돌아 온 생명들이 봄못에 잠시 정주합니다. <점점 분주하고 깊어진다>의 절반 이상을 채운 저 흰색의 정체는, 또 다른 탈주를 시도하기 위해 “보는” 것을 대신해 “보여지는” 것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눈을 가리면 볼 수 있고>(2025)는 눈꺼풀을 닫고, 보여지는 것과 시선을 맞추어야 하는, 이 불편한 박탈을 경험해야 합니다.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어둠을 상상하는 일입니다. 형상의 잔해들을 향해 시선을 열고, 침묵의 언어들로 이 세계의 어둠과 소통하는 일, 그것이 그가 보여주는 회화의 해방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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